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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야기의 능력,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의 예수 이야기 이해(the Power of Jesus Narrative, and the Appropriation of Jesus Narrative in American Evangelicalism)—피터 헬첼(Peter Heltzel)의 예수와 정의(Jesus and Justice)
예수 이야기는 매력적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이야기에는 매력을 많이 느끼지요. 좀 더 넓게 보자면, 기독교 신학은 성경 전체를 모두 예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 이야기에 침잠되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왜일까요? 이 서평에서 그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각설하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문화에도 이야기가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까닭은 그 이야기들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말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우리의 이야기의 조각들을 문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 틀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문화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 틀을 조금씩 바꿔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그게 우리의 이야기든, 문화 안에 있는 이야기든, 현실의 특정한 면에 초점을 맞춘 재구성이며, 그런 특성상 제한적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런 까닭에 이야기는 우리가 특정한 때에 현실의 어떤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