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제대로 알려면, 무엇보다도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네가 몇 살이냐?”
이 말은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상대방의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면, 말 그대로 ‘나이가 몇 살이냐’는 질문이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말했다면, ‘나잇값 좀 해라’는 책망이 된다. 이처럼 말의 의미는 상황을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언어 학자들은 '상황을 떠난 말은 문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라삐여,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압니다. 하느님께서 같이 계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요3:2)
이 말도 제대로 알려면, 상황을 알아야 한다. 상황은 두 가지이다. 니고데모의 신앙(요2:23~25)과 니고데모의 신분(요3:1)이다.
니고데모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믿은 신앙이다.“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가 잘 말해준다. 물론, 그가 과연 예수님의 이름을 어떤 분으로 믿었는지, 세례 요한이 증언한대로 “하느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믿었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하러 오신 “이스라엘 임금님”(요1:49)으로 믿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인 것 같다. 즉, 이스라엘 왕으로 믿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요2:24).
실제로 니고데모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였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다.
‘너희가 믿지 않는다’(요3:12)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1:15)
‘하느님께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3:16)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자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3:18)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분명히 뭔가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으려면, 그것을 반드시 믿어야하고, 그래도 믿지 않는다면, 심판을 받는다 경고까지 하신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나무에 달리시는 예수, 요3:14)이다.
잘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수님을 하느님의 양으로 믿지 않고 있다.
이때 니고데모의 잘못된 신앙은 바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증언대로 믿지 않고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믿는 신앙'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양으로 믿지 않고, 이스라엘 왕으로 믿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엉터리 학자들은 그것을 ‘표적 신앙’ 즉, 표적만 의지하는 신앙이라고 말하거나 혹은 ‘세속 신앙’ 즉,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신앙이라고 횡설수설한다. 그들이 진정한 학자였다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이름을 어떤 이름으로 믿었는지 따졌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을 참작했어야 한다.
이런 자들은 니고데모의 말도 오해한다. 물론, 상황파악이 잘못됐으니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니고데모의 말이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의미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니고데모는 ‘영생복락을 추구한 소심한 지식인’이었다고 망발을 한다.
한때는 나도 이런 자들의 말을 듣고 니고데모를 싫어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들의 최고 의원이라는 자가 구원의 확신도 없고, 거기다 개인의 신앙 상담을 위해 은밀히 예수님을 찾았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로 잘못이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문제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온 자였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싶어서 온 것이다.
우리가 니고데모의 신앙 상황을 알았다고 바로 니고데모의 말을 해석할 수는 없다. 위에서 ‘네가 몇 살이냐?’는 우리말이었기 때문에 즉, 문법적 이해에 있어서 전혀 장애가 없었기 때문에 상황만 알면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말은 헬라어로 돼 있다. 이 말은 니고데모의 말은 상황도 알아야 하고, 문법도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니고데모의 말이 현재 제대로만 번역됐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헬라어가 어떻고, 문법이 어떻고 하기 싫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말 듣기 싫어 한다. 요즘 사람들은 우리 안에도 성령이 계시고 그분이 깨닫게 해주시니 굳이 헬라어 몰라도 된다는 투로 말한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반만 맞다. 우리는 언어를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현재, 니고데모의 말은 두 가지 번역 오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번역누락과 번역 도치이다.
다음은 번역누락을 바로 잡은 것이다.
“라삐여,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한] 선생인줄 압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와] 같이 계시지 않으면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요3:2)
이때, 대괄호 안에 단어들 즉, “한”, “만약”, “그와”, “왜냐하면”은 누락한 것들을 모두 복원한 것이다. 이중 ‘한’과 ‘만약’과 ‘왜냐하면’은 어떤 면에서 누락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와’(with him)는 결코 누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him)는 결코 예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참고로, 영역성경은 결코 그것을 누락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번역도치를 보자. 번역도치란 번역순서가 뒤바뀐 것을 말한다. 위의 복원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동안 의미가 통하는 것처럼 보였던 문장이 갑자기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같이 계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는 그동안 의미가 통하는 문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복원을 해놓고 보니,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즉, ‘[만약] 하느님께서 [그와] 같이 계시지 않으면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는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왜냐하면”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냐하면~” 구문의 자리와 “[만약]~”구문의 자리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도치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잡으면, 이렇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 [만약] 하느님이 [그와] 같이 계시지 않으면’
이러한 사실들은 영역 성경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금방 알 수 있다.
“Rabbi, we have known that from God thou hast come a teacher, for no one these signs is able to do that thou dost, if God may not be with him.”(라삐여 우리는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한 선생인줄 압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읍니다. 만약, 하느님이 그와 같이 계시지 아니한다면 [말입니다])(요3:2 YLT)
불행히도, 두 가지 오류는 천주교 개신교 할 것 없이 모두, 그리고 헌 성경 새 성경 할 것 없이 모두 가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몇 번의 개정을 거쳤으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니고데모의 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다.
오류 중 가장 어리석은 오류는 ‘그와’를 번역 누락했다는 것이다. 바레트란 학자는 어리석게도 ‘그’가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만약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을 해석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하느님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함께 하신 것 못지않게 예수와도 함께 계신다” 사실상 ‘그’를 ’예수’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성경번역에 참여한 한국학자들도 ‘그’를 바레트처럼 이해했기에 누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법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줄곧 ‘당신’으로 불렀다. 그런데 마지막에서 가서는 예외로 당신을 ‘그’로 바꿔 불렀다? 이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주일성수를 잘합니다. 당신은 십일조도 꼬박꼬박 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주일성수를 잘합니다. 당신은 십일조도 꼬박꼬박 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윗 문장과 아랫 문장을 함께 읽고 두 문장이 같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다. 아마도 외국인인지, 정신이상자인지 다시금 살펴 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신이상자 같은 현상이 우리 앞에 있는데도,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니고데모 무시가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니고데모를 무시한다.
‘율법주의자’, ‘동문서답하는 자’, ‘학식에 비해 영적인 것에는 무지한 자’ 등등
이런 무시가 니고데모의 말을 이성적으로 못보게 만들었고, 연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또 다른 니고데모의 말(요3:4)도 마찬 가지로 우리는 오역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결코 늙은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니고데모는 헬라어 게론을 '늙은이'로 말한 것이 아니라, '원로'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그것을 늙은이로 번역해놓고 니고데모를 무시하고 나무란다. 정녕 무식한 자는 그들이다.
사실 '그'를 알지 못한 것은 '[한] 선생'을 알지 못한 탓이다. 유대인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느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한 선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한 질문에서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네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라고 질문하면서 정체를 여쭈어 봤다(요1:25). 이는 유대인들이 세 명의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정체도 그런 식으로 점쳤기 때문이다(cf. 요6:14;7:26,40;9:22;12:34;).
이를 감안 하면, 니고데모의 말은 '당신은 어떤 분이십니까?'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요지가 아니다. 진짜 요지는 니고데모의 신앙 상황이 반영되어야 한다. 즉, 예수를 세례 요한 증언대로 믿지 않고, 이스라엘 왕으로 믿은 것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대속적 메시아로 믿지 않고, 정치적 메시아로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요지는 '당신은 어떤 메시아입니까?'가 된다.
니고데모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표적만 봐서는 이스라엘 메시아로 믿고 싶었지만, 그러나 세례 요한의 증언을 알고 있던터라 무턱대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고데모의 말(요3:2)은 신앙 상황을 고려할 때, '당신은 어떤 메시아입니까?'로 봄이 타당하다. 이것은 공적인 질문이지 결코 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그러니 제발 니고데모를 영생복락을 추구한 소심한 지식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길 바란다(특히 개신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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