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게시판 사용자 여러분께 공지드립니다.
잦은 스팸으로 인하여 게시물 노출 방식을 불가피하게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게시물 등록 방식은 이전과 같고 노출은 관리자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글 작성후 24시간 내에 검토후 노출될 예정이오니 이용에 참고하여 주십시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 기독일보
밀양, 오정현 목사, 그리고 교회의 두 부류 1. 밀양 2. 오정현 목사와 논문표절 3. 교회의 두 부류
1.밀양
‘밀양’이란 영화(이창동 감독)가 상영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밀양의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의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한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의 설교말씀도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이분들의 글이나, 말씀 중에서 대부분은 신애가 속물임을 최우선으로 언급했습니다. 저도 속물이기 때문에,......사실 이 세상에서 속물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속물의 사전적 의미는 “세속적인 명리(名利)에만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명리란 말은 ‘명예’와 ‘이익’을 의미하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성직이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거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처음과 다르게 세상의 ‘명’과‘리’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는 특별히(직분 상)그들이 세상과 분리된 것 같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결국은 종교란 이름의 가면을 쓰고 ‘명’과‘리’를 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물이지만 자기만은 속물이 아닌 척 한다는 의미에서, 전자와 후자는 쓰고 있는 가면만 다를 뿐 결국은 둘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척’이란 가면이든지 ‘종교’란 가면이든지 가면을 쓰고 있다면, 둘 다 속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위의 성경말씀은 그리스도와, 교인들 간의 초심으로 가졌든 사랑을 버리고 ‘명리’를 쫓는 사람들을 향한, 꾸짖음에 대한 성경말씀입니다. 물론 에베소 교인들은 여전히 겉보기 악[계2:6]은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열심을 내지 않고 인내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지만, 게으르고 인내하지 않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당연히 속물적인 행동이라는 결과로 되돌림 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에베소 교인들의 처음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요한계시록2:2절에서는 그들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가졌을 때는 거짓된 것들을 드러냈다[계2:2]고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거짓말하는 자(거짓된 자)들을 드러내고, ‘저것은 거짓이다.’ 라고 온전히 지적하여 그들을 추궁하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는데[계2:2,3], 지금은 너가 (인내하지 않고, 게으름의 결과로 당연히)거짓을 행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너는 처음 사랑을 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이 거짓에는 적당히 종교란 이름의 가면을 쓰고 ‘명리’를 쫓는 행위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처음사랑을 버린 행위입니다. 위의 성경말씀에서, 너는 에베소 교회와 그 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그것도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Remember the height from which you have fallen! Repent and do the things you did at first. If you do not repent, I will come to you and remove your lampstand from its place.”[Revelation 2:5 ,NIV]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심판받아‘지옥간다’는 의미입니다. 촛대를 옮기지 않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의 사전적 의미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란 뜻입니다. 이런 회개의 의미는 두 개의 단어가 합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뉘우친다는 말입니다. 뉘우침이란 말은 ‘잘못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친다’란 말입니다. ‘고친다’는 말은 ‘수선하다’ ‘바로잡다’ ‘바꾸다’ ‘변경하다’ ‘모양이나 위치를 바르게 하다’ 란 의미입니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리는 행위를 회개라고 합니다. 원어로 위의 계시록 말씀은 메타노에오(metanoevw)란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어의 의미로 회개란 말은 마음의 작용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의 성경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회개에는 세 가지 연속적인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행위’로 돌아가는 연속적인 단계가 바로 온전한 회개입니다. 위의 성경말씀[계2:5]에는 두 번의 회개란 말이 나옵니다.
첫 번째 회개란 말은 마음의 회개로서 뉘우침을 의미하고, 두 번째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에서 ‘회개’는 앞의 세 가지 단계 전부를 포함하는 회개의 의미입니다. 문맥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계시록말씀[계 2:5]은, 처음사랑을 버린 거짓의 사람은 회개하여 처음 행위로 되돌아가라는 구체적인 지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되돌리는 행위는 회개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고 ‘처음행위’로 돌아가지 않으면, 네 촛대 즉 결과적으로 천국은 그들에게는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눅15:16~21]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위의 성경말씀가운데 16절~20절이 회개를 의미하는 행위란 것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목사님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하고나서는 걸핏하면 기도원이나 다락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는, 회개했다고 말하는 것은 위의 성경말씀에서 21절이 시사하고 있는 의미만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목사님들이 세상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하고 나서는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 좀, (많이(?) 해도 마찬가지지만)하고는 회개했다고 말하고, 그것이 전부인양 행동하는 것은, 위의 누가복음에서 탕자가 16절~20절까지의, 생각하고(17절), 회개하고(18,19절),처음행위로 돌아가는(20절) 연속적인 행위는 빼먹고, 위의 18절에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는 행동은 하지 않고, 탕자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하고 말은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계속해서 배를 채우고자 노력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탕자가 되돌아오는 행위는 없이, 21절의 탕자의 회개의 말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목사님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전적 의미나 성경적 의미에 따르면 회개는 잘못되었기에 바르게 되돌린다는 의미가 회개란 말이 가지는 뜻입니다. 밀양에서 신애가 비디오 가게에서 CD를 훔칩니다. 회개는 훔친 CD를 되돌려주는 행동이 회개입니다. 훔친CD는 감추어 두고,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입으로만 회개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탕자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아버지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아버지는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그 일몰의 시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절뚝이며 돌아 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회개는 상응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밀양’이란 영화에서 신애(전도연 분)가 예수를 믿고 자기 자식을 유괴 납치하여 죽인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하면서, 그자가 있는 형무소에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 사람이 자기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면회를 갔다 온 후, 집을 찾아온 목사님이 신애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신애씨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용서하고 싶어서, 용서해 줄라고 만났는데, 막상 용서는 안 되고 마음만 더 괴로운 것이지요? 이럴 때 일수록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신애가 말합니다. “용서를 해!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이미 용서를 받았데, 하나님한테,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데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데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왜? 왜에,...~~~~???”
이 영화는 회개와 용서에 대한 놀라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와 신학대학 교수님의 글을 읽어 보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성경적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래 성경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I tell you the truth, whatever you bind on earth wi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will be loosed in heaven.”[마 18:18,NIV]
죄와 회개[마4:17]와 용서는 먼저 땅에서 풀려야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 즉 신애로 부터 먼저 용서받지 않은 그 유괴살인범이 말한 용서 받음은, 성경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착각입니다. 물론 그 죄인에게 전도를 한 사람은, 추측하건데, 죄와 용서와 회개의 관계를 모르고 단지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말한 것에 불과한데 그 유괴범은 자신이 용서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대학 교수님께서는 기독교의 용서의 정신은 인간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신애의 분노는, “하나님의 내가 너를 용서한다는 주권적 선언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모르고”있기 때문에, 신애의 얕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공부는 많이 했지만, 정말 성경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용서하신다면, 왜 성경에서는 그렇게도 많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위의 성경말씀 바로 앞의 주기도문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12,13]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마6:12]
위의 말씀에 상당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4]
용서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위의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명확히 가르쳐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는 권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회개와 더불어 예수 믿는 자의 필연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애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용서 개념의 피상화”라는 소제목으로, 밀양의 용서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는 어느 신학대학교수님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영화의 핵심 장면이라고 볼 수 있는 용서를 실천하러 간 여인이 살해범이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자기도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는 태도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영화는 이를 여인의 울분을 그려내기 위한 문학적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기독교의 용서를 가장 잘 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함께 있던 두 강도가 묘사되어 있는데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회개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강도의 신앙고백을 듣고 이 강도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 분명한 것은, 위의 이 저명한 교수님의 글이 저의 작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은 너무 유명한 분이기 때문에 저의 성경 지식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씀드린다고 하드라도, 저의 판단에 이 분의 영화를 감상하는 눈은 정말 형편없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왕왕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오른쪽 죄수[눅23:39~43]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예수십자가의 오른쪽 죄인이 회개하자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인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 없으신 분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처벌이 죄를 속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예수님 좌우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의 십자가 처형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응분의 보응[눅23:41]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왕왕이 사형을 받은 사람들이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죄의 댓가를 치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의 생각에, 십자가 좌우 행악자들은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든 원인 죄에 대해서는 세상의 징벌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처형으로 댓가를 치렀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보응, 즉 응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속성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음에도 그들이 죄의 댓가를 치렀다(응보)고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의 죄의 댓가를 치렀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좌우 죄수에게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좌측의 죄수는 우측의 죄수가 말하는 것처럼, 그 죄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함(어리석음)[눅23:40]과 자신의 십자가 처형이 죄에 상당하는 보응[눅23:41]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측의 죄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았으나, 그의 죽음은 자신의 처형이 자신의 죄의 응보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처형은 받았으나 댓가를 치렀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가치란 항상 부여하는 자(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측 행악자는 십자가에 달린 중심(원인)죄악에 대해서는 댓가를 치렀다[눅23:41]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심죄악이 아닌 경우의 죄에 대한 평가는 예수님의 용서의 권능(대속)에 의존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산다는 의미에서의 원죄에 대한 것도 예수님의 죄사하심(대속)이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그러나 우측행악자의 십자가처형은 그 사람의 전부가 말살되는 사건입니다. 더 이상의 무슨 응보(용서)가 필요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형제도는 어떠한 경우이든지 인간의 처벌로는, 한 인간에게는 전부의 말살이기 때문에 재고가 필요한 제도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서, 우측 행악자의 기도는 있으나[눅23:42] 용서나 회개에 대한 언급은 별도로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없이 단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선언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이런 선언은 결국 예수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만에 의해서 낙원에 거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사형수가 처형을 받는 것으로 죄가 깨끗해지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만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는 역사입니다. 우측 행악자가 댓가를 치렀다는 뜻은, 그의 징벌적 처형이 구원의 요건을 전부 갖추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는 어떠한 경우든지 아닙니다. 그 죄수는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눅23:42]”라는 표현에서, 십자가 우측 행악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회개와 용서--->>>이것은 자기를 전부 잃는 보응[눅23:41]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더 이상 무슨 구원의 요건이 필요합니까? 물론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는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구원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회개와 용서라는 죄의 문제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 우측 행악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받고,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도 옥고를 치르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밀양의 용서의 문제는 피해자의 고통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밀양의 유괴범이 진실로 회개했다고 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십자가 우측 죄수의 문제는 그 죄수로 인하여 고통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 우측 행악자가 낙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십자가 우측 죄수가 예수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가 회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는 자신으로 인하여 고통 받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 시간이 없다는 것이 확실히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행악자에게 피해를 입은 고통 받는 사람의 문제는 차후에 예수님께서 치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확실히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서 은밀히 빛나는 비밀의 태양은, 제 생각에 일반은총이 아닙니다. 신애가 혼자서 머리를 깍고 있을 때 종찬(송강호 분)이 ‘하하’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는 신애가 잘 보고 머리를 깍을 수 있도록 거울을 들고 서있습니다.
비밀의 태양이 빛납니다. 그 빛은 일반은총이 아닙니다. 종찬을 통하여 보여주는 신애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으로 그녀 앞에 드러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암시라고 생각됩니다. (종찬은 이 비련의 여인 신애에게,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예비된 사람이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