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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맹신은 무지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글입니다. 요한복음 3장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는 성령으로 거듭남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신자의 영혼을 살아나게 한다는 가르침이다. 문제는 이 가르침이 실제로 니고데모에게 주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성령이란 계시는 오직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졌고, 그것도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고하시면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령 계시는 오직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졌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전야에 세족식과 성찬식을 거행하시면서 엄숙하게 성령 계시를 주셨다(요13~16장). 이때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갔고, 오직 열한 제자만 있었다. 또한 성령 계시는 죽으심과 부활하심 예고와 함께 주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믿어야만 성령 계시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cf.요14:5;20:19). 다음 구절은 성령 계시가 그 예고와 함께 주어졌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내가 떠나가는 것[죽음]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부활]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님은 결코 니고데모에게 성령 계시를 주실 수 없다. 니고데모는 초면의 사람이고, 아직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게다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다(cf.요3:2).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 원인을 찾던 중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 성경의 모체이자, 기독교 최초 공인성서인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AD 405)가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오역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라틴 벌게이트는 교부 제롬(Jerome)이 만든 것이다. 그 당시 로마 교회는 여러 종의 라틴어 역본들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보다못한 교황 다마수스 1세(AD 366~384 재위)는 역본을 개정하여 하나의 권위 있는 역본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비서이자, 그 당시 살았던 자로서는 가장 유능한 성경신학자 제롬에게 그 일을 맡겼다(AD 382). 제롬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AD 405년에 모두 완성했다. 라틴 벌게이트. 이것이 바로 제롬이 이십여 년 동안 혼신을 다해 만든 라틴어 역본이다. 이 역본은 천년 동안(AD 400~1530) 그 권위를 발휘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오역 논란 속에 결국 몇 차례 개정되는 수모를 겪었다. 클레멘틴 벌게이트(Clementine Vulgate, 1592)와 노바 벌게이트(Nova Vulgate, 1979)가 그 결과물이다. 이때 최종 개정판 노바 벌게이트는 라틴 벌게이트의 오역 사실을 알게 하였다. 오역은 요3:5에서 일어났다. 이 구절은 이른바 개정 금기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성령으로 거듭남 핵심 구절로서, 이것을 개정할 경우 수백 년 동안 유지돼왔던 그 유명한 교리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레멘틴 벌게이트도 예상컨대 감히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이 역본은 제롬을 베꼈다). 그러나 노바 벌게이트는 달랐다. 아주 혁신적으로 개정했다. 다음은 요3:5에 대한 두 역본의 비교이다. “Respondit Jesus: Amen, amen dico tibi, nisi quis renatus fuerit ex aqua, et Spiritu Sancto, non potest introire in regnum Dei.”(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Latin Vulgate) “Respondit Iesus: “ Amen, amen dico tibi: Nisi quis natus fuerit ex aqua et Spiritu, non potest introire in regnum Dei.”(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Nova Vulgate) 보다시피, 노바 벌게이트는 매우 혁신적으로 개정했다. 핵심 어휘라 할 수 있는 성령(“Spiritu Sancto”)과 거듭나다(“renatus”)를 각각 영(“Spiritu”)과 나다(“natus”)로 개정했기 때문이다(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스피리투가 대문자로 시작된다하여 이것을 성령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제롬 때에는 대소문자 구별이 없었고, 그것은 8세기 카를(Karl) 대제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제롬의 오역은 정말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동안 무려 1600년 동안이나 가짜 가르침에 속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은혜도 받았지만, 사실상 그 은혜는 진리적 은혜가 아니라, 헛된 은혜였던 것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하던 중 사실 쪽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롬이 사실상 헬라어 프뉴마(πνεῦμα)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롬은 자신의 다른 저작물에서 요3:5을 두 번이나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두 인용에서 프뉴마 번역은 차이가 난다. 제롬은 오케아누스 서신(AD OCEANUM)과 펠라기우스주의 반박(DIALOGUS ADVERSUS PELAGIANOS)에서 요3:5을 각각 한 번씩 두 번 인용했다. 그런데 전자에서는 프뉴마를 영(“Spiritu”)으로 번역한 반면, 후자는 성령(“Spiritu sancto”)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사실은 제롬이 프뉴마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대변해준다(참고로, 프뉴마는 예수님에 의해 5회 사용되었다(요3:5,6(2회),8(2회)). 이때 제롬은 5회의 프뉴마를 “성령”, “영”, “영”, “영”, “영”으로 번역했다). 사실, 제롬은 프뉴마를 깊이 있게 연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겨우 “일 년 남짓” 기간에 그가 사복음서를 모두 개정했다는 것이 잘 대변해준다. 사실, 이 기간은 단지 복음서 한권을 연구하는 시간으로도 충분치 않은 기간이다. 메쯔거는 「사본학」에서 이처럼 말한다. “일 년 남짓 이내에 제롬은 그의 일의 첫 열매로서 극단적인 변화를 한 사복음서의 본문 개정판을 다마수스 황제께 증정할 수 있었다.” 흔히들,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쉬우면서도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러다 보니, 학자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물론, 4,5개월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다. 사실, 제롬의 번역은 영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손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역본의 수정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그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번역 서문에서 자신의 개정 원칙을 말한바 있다. 메쯔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그의 개정판의 근거로서 비교적 좋은 라틴어 본문을 사용했고, 그것을 다른 고대 헬라어 사본과 비교했다. 그는 그가 가능한 한 보수적으로 유통된 라틴어 본문을 취급했고, 그것을 뜻이 왜곡된 곳에서만 고쳤다고 강조했다” 이때 “왜곡된 곳에서만 고쳤다”는 말은 자신의 것이 수정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다음으로는,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베투스 라티나는 제롬 이전의 역본을 일컫는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 베투스 라티나는 현재 22종이 있다. 그 중 VL35: Liber Moliensis(Book of Mulling)는 제롬이 몇 군데만 수정했다할 정도로 거의 동일하다(참고로, 22종의 베투스 라티나 중에서 5회의 프뉴마를 제롬처럼 번역한 것들도 많다. VL35를 비롯하여 VL29: Codex Sangermanensis secundus, VL30: Codex Gatianus, VL32: Lectionarium Gallicanum, VL48: Codex Sangallensis 51 등이 그것이다. 물론, 노바 벌게이트처럼 번역한 것도 있다. VL10: Codex Brixianus, VL33: Codex Carnotensis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롬이 결코 프뉴마를 연구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보수적이라 생각한 역본에서 힌트를 얻었을 뿐임을 잘 말해준다. 사실, 프뉴마는 그 당시 그야말로 연구대상이었다. 역본들마다 달리 해석한 탓인데, 베투스 라티나를 보면, 크게 다섯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어떤 역본은 5회의 프뉴마를 “영”, ‘영”, “영”, “영”, “영”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어떤 역본은 “영”, “영”, “영”, “영”, “물과 영”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영”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물과 성령”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물과 영”으로 번역했다. 이란 사실은 누가 봐도 연구대상감이다. 종종 우리는 성경해석을 위해 주석을 보다가, 주석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당황한다. 그래서 도대체 어느 것이 옳은가 하고 고민한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 성경은 오래오래 기억된다. 평신도나 목회자도 그럴진대 학자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제롬이 만약 프뉴마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고민했고, 또한 영혼을 다해 연구했다면, 지금처럼 그것을 잊어버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제롬은 프뉴마를 알지 못했다. 그는 노바 벌게이트의 지적대로 오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남은 단지 한 사람의 무지가 빚어낸 그야말로 초대형 해프닝이자, 수많은 맹신자를 유발한 가짜 가르침의 극치인 셈이다. 가짜란 분명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짜는 두 가지 해악을 끼쳤다. 직접적으로는 니고데모에게 해악을 끼쳤다. 니고데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참제자이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장사한 이유는 그분을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전승이 잘 대변해준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적대적인 유대인의 수중에서 허다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공회에서의 직분도 박탈당한 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 전승은 니고데모가 장사 후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말한다. 물론, 개종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양으로 깨달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예수를 하나님의 양으로 깨달은 참제자이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가짜에 속아 니고데모를 결코 참제자라 말하지 않았다. 먼저, 천주교에서 니고데모는 참제자가 아니다. 천주교는 니고데모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성경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언급이나 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마디로, 참제자가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면서도, 천주교는 니고데모를 성인으로 추앙한다(축일 8월 3일). 하지만, 이것은 교회 전승에 따른 추앙이지 결코 성경적 추앙이 아니다). 다음으로, 개신교에서도 니고데모는 참제자가 아니다. 일례로, 한국 개신교에서는 니고데모를 “비모범제자”(김문현)로 평가하고, 심하게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자’(종교학 대사전)로까지 평가한다. 이처럼 교회는 니고데모를 참제자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진작부터 노바 벌게이트를 받아들였다면(비록 의미를 모르고 받아들였다할지라도), 어땠을까? 분명, 니고데모를 이 지경까지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 안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장사한 이유를 감지할 만한 단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단서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아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다(요3:14,15). 이때 우리는 얼마든지 그 단서와 함께 십자가 앞에 용감하게 나온 니고데모를 한번쯤은 마치 에드윈 블룸처럼 좋은 쪽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때에서야 예수께서 들리시리라는 것과 당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살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짜가 우리의 눈을 가려 그 단서를 무시하게 만들었고, 결국 니고데모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 가짜는 직접적으로는 니고데모에게 해악을 끼쳤다. 간접적으로는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 해악을 끼쳤다. 현재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수많은 성경난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나 프뉴마는 유명한 성경난제이다. 이미 보았듯이, 제롬은 프뉴마를 비록 한번이긴 하지만, 어쨌든 성령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말씀하신 것을 기정사실화한 것이요, 한편으론, 프뉴마가 얼마든지 성령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이다. 후대 성경들은 제롬에게 그대로 반응했다. 제롬의 기정사실을 모두 받아들였고(몇몇은 제외), 잘못된 신호에 잘못을 더하여 프뉴마를 제멋대로 번역했다. 현재 프뉴마는 무려 다섯 가지 방법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름하여 YLT 형(“성령”, “성령”, “영”, “성령”, “성령”), Luther 형(“성령”, “성령”, “영”, “바람”, “성령”), NAB 형(“성령”, “영”, “영”, “바람”, “성령”), Wycliffe 형(“성령”, “영”, “영”, “바람”, “영”), WEB 형(“영”, “성령”, “영”, “바람”, “성령”)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후대가 제롬의 기정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였고, 잘못에 잘못을 더하여 프뉴마를 제멋대로 번역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참고로, 현대 성경은 이상하게도 제롬의 액면 그대로의 번역은 취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제롬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노바 벌게이트가 제롬을 버린 것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이처럼 가짜는 두 가지 해악을 끼쳤다. 필자는 ‘물과 영으로 남’을 수년간 연구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양으로 제자가 됨(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세례 요한’을 상징하고, ‘영’이 ‘증언’을 상징하고, ‘나다’가 ‘제자가 되다’를 상징하면서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제자가 되다’ 곧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제자가 되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온전히 하나님의 양에 관한 대화였고, 니고데모는 오직 하나님의 양만을 가르침 받은 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니고데모 세 기록, ‘예수께 가르침 받는 니고데모’(3장), ‘예수를 변호하는 니고데모’(7장), ‘예수를 장사하는 니고데모’(19장)는 곧 ‘니고데모가 예수께 하나님의 양을 듣고, 그것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결국 그것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진리로 깨달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짜는 반드시 밝혀져야만 했다. 감사하게도, 그 시작을 노바 벌게이트가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0여년이 흐르도록 아무도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가짜를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
기독교의 맹신은 무지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꼭 읽어 볼 필요가 있는 글입니다. 요한복음 3장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는 성령으로 거듭남이라는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신자의 영혼을 살아나게 한다는 가르침이다. 문제는 이 가르침이 실제로 니고데모에게 주어졌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성령이란 계시는 오직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졌고, 그것도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예고하시면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령 계시는 오직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졌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전야에 세족식과 성찬식을 거행하시면서 엄숙하게 성령 계시를 주셨다(요13~16장). 이때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갔고, 오직 열한 제자만 있었다. 또한 성령 계시는 죽으심과 부활하심 예고와 함께 주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믿어야만 성령 계시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cf.요14:5;20:19). 다음 구절은 성령 계시가 그 예고와 함께 주어졌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내가 떠나가는 것[죽음]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부활]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예수님은 결코 니고데모에게 성령 계시를 주실 수 없다. 니고데모는 초면의 사람이고, 아직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게다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다(cf.요3:2).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 원인을 찾던 중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 성경의 모체이자, 기독교 최초 공인성서인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 AD 405)가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오역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라틴 벌게이트는 교부 제롬(Jerome)이 만든 것이다. 그 당시 로마 교회는 여러 종의 라틴어 역본들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보다못한 교황 다마수스 1세(AD 366~384 재위)는 역본을 개정하여 하나의 권위 있는 역본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비서이자, 그 당시 살았던 자로서는 가장 유능한 성경신학자 제롬에게 그 일을 맡겼다(AD 382). 제롬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AD 405년에 모두 완성했다. 라틴 벌게이트. 이것이 바로 제롬이 이십여 년 동안 혼신을 다해 만든 라틴어 역본이다. 이 역본은 천년 동안(AD 400~1530) 그 권위를 발휘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오역 논란 속에 결국 몇 차례 개정되는 수모를 겪었다. 클레멘틴 벌게이트(Clementine Vulgate, 1592)와 노바 벌게이트(Nova Vulgate, 1979)가 그 결과물이다. 이때 최종 개정판 노바 벌게이트는 라틴 벌게이트의 오역 사실을 알게 하였다. 오역은 요3:5에서 일어났다. 이 구절은 이른바 개정 금기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성령으로 거듭남 핵심 구절로서, 이것을 개정할 경우 수백 년 동안 유지돼왔던 그 유명한 교리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레멘틴 벌게이트도 예상컨대 감히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이 역본은 제롬을 베꼈다). 그러나 노바 벌게이트는 달랐다. 아주 혁신적으로 개정했다. 다음은 요3:5에 대한 두 역본의 비교이다. “Respondit Jesus: Amen, amen dico tibi, nisi quis renatus fuerit ex aqua, et Spiritu Sancto, non potest introire in regnum Dei.”(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Latin Vulgate) “Respondit Iesus: “ Amen, amen dico tibi: Nisi quis natus fuerit ex aqua et Spiritu, non potest introire in regnum Dei.”(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 Nova Vulgate) 보다시피, 노바 벌게이트는 매우 혁신적으로 개정했다. 핵심 어휘라 할 수 있는 성령(“Spiritu Sancto”)과 거듭나다(“renatus”)를 각각 영(“Spiritu”)과 나다(“natus”)로 개정했기 때문이다(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스피리투가 대문자로 시작된다하여 이것을 성령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제롬 때에는 대소문자 구별이 없었고, 그것은 8세기 카를(Karl) 대제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제롬의 오역은 정말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동안 무려 1600년 동안이나 가짜 가르침에 속은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은혜도 받았지만, 사실상 그 은혜는 진리적 은혜가 아니라, 헛된 은혜였던 것이다. 사실여부를 확인하던 중 사실 쪽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한 가지 단서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롬이 사실상 헬라어 프뉴마(πνεῦμα)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롬은 자신의 다른 저작물에서 요3:5을 두 번이나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두 인용에서 프뉴마 번역은 차이가 난다. 제롬은 오케아누스 서신(AD OCEANUM)과 펠라기우스주의 반박(DIALOGUS ADVERSUS PELAGIANOS)에서 요3:5을 각각 한 번씩 두 번 인용했다. 그런데 전자에서는 프뉴마를 영(“Spiritu”)으로 번역한 반면, 후자는 성령(“Spiritu sancto”)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사실은 제롬이 프뉴마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대변해준다(참고로, 프뉴마는 예수님에 의해 5회 사용되었다(요3:5,6(2회),8(2회)). 이때 제롬은 5회의 프뉴마를 “성령”, “영”, “영”, “영”, “영”으로 번역했다). 사실, 제롬은 프뉴마를 깊이 있게 연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겨우 “일 년 남짓” 기간에 그가 사복음서를 모두 개정했다는 것이 잘 대변해준다. 사실, 이 기간은 단지 복음서 한권을 연구하는 시간으로도 충분치 않은 기간이다. 메쯔거는 「사본학」에서 이처럼 말한다. “일 년 남짓 이내에 제롬은 그의 일의 첫 열매로서 극단적인 변화를 한 사복음서의 본문 개정판을 다마수스 황제께 증정할 수 있었다.” 흔히들,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쉬우면서도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러다 보니, 학자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물론, 4,5개월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다. 사실, 제롬의 번역은 영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손끝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역본의 수정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먼저, 그의 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번역 서문에서 자신의 개정 원칙을 말한바 있다. 메쯔거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그의 개정판의 근거로서 비교적 좋은 라틴어 본문을 사용했고, 그것을 다른 고대 헬라어 사본과 비교했다. 그는 그가 가능한 한 보수적으로 유통된 라틴어 본문을 취급했고, 그것을 뜻이 왜곡된 곳에서만 고쳤다고 강조했다” 이때 “왜곡된 곳에서만 고쳤다”는 말은 자신의 것이 수정본임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다음으로는, 베투스 라티나(Vetus Latina)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베투스 라티나는 제롬 이전의 역본을 일컫는다.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 베투스 라티나는 현재 22종이 있다. 그 중 VL35: Liber Moliensis(Book of Mulling)는 제롬이 몇 군데만 수정했다할 정도로 거의 동일하다(참고로, 22종의 베투스 라티나 중에서 5회의 프뉴마를 제롬처럼 번역한 것들도 많다. VL35를 비롯하여 VL29: Codex Sangermanensis secundus, VL30: Codex Gatianus, VL32: Lectionarium Gallicanum, VL48: Codex Sangallensis 51 등이 그것이다. 물론, 노바 벌게이트처럼 번역한 것도 있다. VL10: Codex Brixianus, VL33: Codex Carnotensis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롬이 결코 프뉴마를 연구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보수적이라 생각한 역본에서 힌트를 얻었을 뿐임을 잘 말해준다. 사실, 프뉴마는 그 당시 그야말로 연구대상이었다. 역본들마다 달리 해석한 탓인데, 베투스 라티나를 보면, 크게 다섯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어떤 역본은 5회의 프뉴마를 “영”, ‘영”, “영”, “영”, “영”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어떤 역본은 “영”, “영”, “영”, “영”, “물과 영”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영”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물과 성령”으로, 어떤 역본은 “성령”, “영”, “영”, “영”, “물과 영”으로 번역했다. 이란 사실은 누가 봐도 연구대상감이다. 종종 우리는 성경해석을 위해 주석을 보다가, 주석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당황한다. 그래서 도대체 어느 것이 옳은가 하고 고민한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 성경은 오래오래 기억된다. 평신도나 목회자도 그럴진대 학자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제롬이 만약 프뉴마에 대한 예수님의 의도를 고민했고, 또한 영혼을 다해 연구했다면, 지금처럼 그것을 잊어버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제롬은 프뉴마를 알지 못했다. 그는 노바 벌게이트의 지적대로 오역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남은 단지 한 사람의 무지가 빚어낸 그야말로 초대형 해프닝이자, 수많은 맹신자를 유발한 가짜 가르침의 극치인 셈이다. 가짜란 분명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짜는 두 가지 해악을 끼쳤다. 직접적으로는 니고데모에게 해악을 끼쳤다. 니고데모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한 참제자이다. 물론, 그가 예수님을 장사한 이유는 그분을 세상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전승이 잘 대변해준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적대적인 유대인의 수중에서 허다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공회에서의 직분도 박탈당한 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 전승은 니고데모가 장사 후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말한다. 물론, 개종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양으로 깨달았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예수를 하나님의 양으로 깨달은 참제자이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가짜에 속아 니고데모를 결코 참제자라 말하지 않았다. 먼저, 천주교에서 니고데모는 참제자가 아니다. 천주교는 니고데모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성경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언급이나 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마디로, 참제자가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면서도, 천주교는 니고데모를 성인으로 추앙한다(축일 8월 3일). 하지만, 이것은 교회 전승에 따른 추앙이지 결코 성경적 추앙이 아니다). 다음으로, 개신교에서도 니고데모는 참제자가 아니다. 일례로, 한국 개신교에서는 니고데모를 “비모범제자”(김문현)로 평가하고, 심하게는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자’(종교학 대사전)로까지 평가한다. 이처럼 교회는 니고데모를 참제자라 말하지 않는다. 만약, 진작부터 노바 벌게이트를 받아들였다면(비록 의미를 모르고 받아들였다할지라도), 어땠을까? 분명, 니고데모를 이 지경까지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 안에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장사한 이유를 감지할 만한 단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단서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아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이다(요3:14,15). 이때 우리는 얼마든지 그 단서와 함께 십자가 앞에 용감하게 나온 니고데모를 한번쯤은 마치 에드윈 블룸처럼 좋은 쪽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때에서야 예수께서 들리시리라는 것과 당신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만이 살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짜가 우리의 눈을 가려 그 단서를 무시하게 만들었고, 결국 니고데모도 무시하게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 가짜는 직접적으로는 니고데모에게 해악을 끼쳤다. 간접적으로는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에 해악을 끼쳤다. 현재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수많은 성경난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나 프뉴마는 유명한 성경난제이다. 이미 보았듯이, 제롬은 프뉴마를 비록 한번이긴 하지만, 어쨌든 성령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말씀하신 것을 기정사실화한 것이요, 한편으론, 프뉴마가 얼마든지 성령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것이다. 후대 성경들은 제롬에게 그대로 반응했다. 제롬의 기정사실을 모두 받아들였고(몇몇은 제외), 잘못된 신호에 잘못을 더하여 프뉴마를 제멋대로 번역했다. 현재 프뉴마는 무려 다섯 가지 방법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름하여 YLT 형(“성령”, “성령”, “영”, “성령”, “성령”), Luther 형(“성령”, “성령”, “영”, “바람”, “성령”), NAB 형(“성령”, “영”, “영”, “바람”, “성령”), Wycliffe 형(“성령”, “영”, “영”, “바람”, “영”), WEB 형(“영”, “성령”, “영”, “바람”, “성령”)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후대가 제롬의 기정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였고, 잘못에 잘못을 더하여 프뉴마를 제멋대로 번역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참고로, 현대 성경은 이상하게도 제롬의 액면 그대로의 번역은 취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제롬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노바 벌게이트가 제롬을 버린 것도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이처럼 가짜는 두 가지 해악을 끼쳤다. 필자는 ‘물과 영으로 남’을 수년간 연구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양으로 제자가 됨(믿음)’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세례 요한’을 상징하고, ‘영’이 ‘증언’을 상징하고, ‘나다’가 ‘제자가 되다’를 상징하면서 ‘세례 요한의 증언으로 제자가 되다’ 곧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제자가 되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는 온전히 하나님의 양에 관한 대화였고, 니고데모는 오직 하나님의 양만을 가르침 받은 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니고데모 세 기록, ‘예수께 가르침 받는 니고데모’(3장), ‘예수를 변호하는 니고데모’(7장), ‘예수를 장사하는 니고데모’(19장)는 곧 ‘니고데모가 예수께 하나님의 양을 듣고, 그것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 결국 그것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진리로 깨달았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가짜는 반드시 밝혀져야만 했다. 감사하게도, 그 시작을 노바 벌게이트가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30여년이 흐르도록 아무도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가짜를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